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스마르크해 해전 (문단 편집) == 결말과 여파 == 이로 인해 '''수송선 8척 모두가''', 구축함 중 4척이 '''격침'''되고, 선단 상공을 호위중이던 [[A6M|제로센]] 6기(3월2일 2기, 3월3일 4기)가 격추되었다.[* 2일- 252공 이치히라 비장 행방불명, 252공 노다 이비조 불시착후 구조, 3일- 즈이호 비행대 단죠 상비조 피격추 전사, 즈이호 비행대 마키 비장 Moore중위의 B-17과 충돌 전사, 204공 야토 비장 불시착후 구조, 204공 니시야마 이비조 행방불명, 영어권 위키 비스마르크해 해전에 있는 Fortress Rabaul: The Battle for the Southwest Pacific, January 1942 – April 1943, 페이지 313 출처에서는 손실 7기 손상 3기] 살아남은 나머지 구축함도 상당한 피해를 입고 호송작전 지휘관인 기무라 제독도 중상을 입었다. 이 와중에도 강운함으로 유명한 [[유키카제]]는 별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수송선이 죄다 격침되면서 대다수 육군 병력들이 땅을 밟지 못하고 물고기 밥이 되거나, 정처없이 표류하다가 연합군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의해 포로로 잡히거나 사살당했다. 심지어는 식인 풍습을 가진 현지 원주민들에게 당했다고도 한다. 이런식으로 '''3,000명의 병력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이 수치도 필사적인 구조작업 끝에 손실을 줄인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병력들 중 라에에 도착한 병력은 겨우 1,200명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사실상 맨몸으로만 도착한지라 당장의 전력 보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2,700명의 병력은 출발지인 라바울로 몸만 건져서 되돌아갔다. 일본 육군은 해군에게 이렇게 구출된 병력들을 라바울로 돌려보내지 말고 라에로 바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몸만 보냈다가 무슨 민폐를 끼칠거냐는 투의 핀잔만 듣고 거부당했다. 이 공습으로 연합군 역시 폭격기 2대, 전투기 4대를 손실[* 3일- 제 43 폭격기 편대 B-17 우드무어 중위 마키기와의 충돌으로 탈출에 성공한 승무원은 기총소사로 전원 전사, 제 90 폭격기 편대 B-25 파일럿 불명 착륙 중 추락, 제 39 전투기 편대 P-38F 파우로트 중위 행방불명, 제 39 전투기 편대 P-38F 이슨 중위 행방불명, 제 39 전투기 편대 P-38F 쉬프렛 Jr. 중위 행방불명, No.30 SQ 보파이터 존스 중위 불시착 구조]했지만, 일본군이 입은 타격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이 전투가 일본군에 준 여파는 매우 컸다.''' 일단, '''일본군의 뉴기니 방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미 뉴기니의 동남부 지역을 잃은 상태에서 뉴기니 내륙의 연합군 거점을 제압해야만 뉴기니의 일본군 점령지를 안정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는데, 그 전제조건인 병력 증강/확보에 큰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전투 이후 뉴기니 지역에 대한 보급과 관련하여 일본군 수송선은 더이상 뉴브리튼섬 남쪽으로 내려 오지 않게 되었다. 전방 지역인 라에에 대한 보급은 구축함과 잠수함을 이용한 쥐수송이나 뉴브리튼 서쪽 글로스터곶에서 소형배를 타고 건너가는 방법만 남았다. 과달카날에서 보급 부족으로 인해 일본군이 겪은 고난이 뉴기니 라에-살라모아 지역에서 재현된 것이다. '''이 수송작전이 대실패로 끝나자 일본군 수뇌부들은 육군, 해군 너나 할 것 없이 뉴기니 전선이 당장 붕괴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 당시 일본 육군은 라바울과 솔로몬 제도에 집중하던 해군과 달리 뉴기니 전선에 더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뉴기니 전선 유지에 비상이 걸리자 라바울을 비롯한 솔로몬 제도에 전개했던 일본육군항공대 전력을 모두 철수시키고 뉴기니 일대를 담당하는 웨왁 기지로 재배치시켰다. 이미 진행중이던 후방지역 병력 상륙 계획도 다시 검토하여, 상륙하지 않은 잔여 병력을 보다 전방지대로 상륙시키려 했지만, 일선의 반발로 계획이 다시 변경되는 일도 벌어졌다. 라에로 가려다가 라바울로 되돌아간 병력들은 이후 쥐수송 등으로 조금씩 이동하여 어떻게든 라에에 도착하긴 했다. 그러나, 보급선이 크게 위협받는 상황[* 뉴기니 섬은 그 지형적 특성상 동부와 서부가 사실상 갈라진 상태였고 동부 뉴기니 안에서도 육로 수송이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보급은 라바울을 경유하거나 멀리 후방의 중부 태평양에 있는 팔라우나 트럭으로부터 오는 해상 수송에 의존해야 했다.]에서 전선의 유지는 점점 어려워졌다. 특히, 당장 최일선이 된 라에-살라모아 지역이 연합군의 역습에 당하는 것, 더 나아가 라에 배후의 비티아즈 해협 일대가 연합군 손에 떨어지는 건 시간 문제가 되었다. 일선으로 이어지는 보급선을 유지하기 위해 전방지역(라에)과 후방지역(마당)을 잇는 도로 건설에 착수하기도 했지만, 당시 일본군의 능력으로는 제 때 이 도로를 뚫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일본 해군의 경우 상술한 라바울 포위 가능성을 더욱 우려하고 있었다. 이 사건 이전에 미군이 과달카날 북서쪽의 러셀제도를 점령하여 전진기지를 만들고 신형 전투기를 동원해 솔로몬 제도 중부 부건빌 섬의 일본군 기지에 대한 공습을 시도하는 등 솔로몬 제도에서 미군이 반격에 나설 조짐이 조금씩 보였던 판에, 뉴기니 방면의 증원 실패 소식이 들려왔다. 이 전투로 소중한 구축함 4척을 잃어버린데 이어 솔로몬 제도 중부지역에 대한 미군의 기습에 휘말려 구축함 2척을 또 잃어 버리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솔로몬 전선 유지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에 미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항모 함재기들까지 지상기지로 동원[* 상술한 바와 같이 그때까지 솔로몬 제도의 항공전력을 담당하던 한 축이었던 육군항공대 전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면서 이 일대의 일본군 항공전력이 약화된 사정 때문에 항모기동부대의 반발을 자신의 지위로 억누르며 동원했다.]하여 과달카날과 뉴기니 일대의 연합군 기지에 대한 대규모 항공공격(이호 작전)을 단행하였지만, 초라한 전과만 거두고 항공기 피해만 입은 채 실패했다.(1943년 4월 7일~14일) 그러나, 야마모토에게 검증없이 올라온 전과 보고는 터무니 없이 과장[* 약 30척에 달하는 함선과 180대에 달하는 항공기를 파괴했다고 보고되었지만, 실제 연합군의 피해는 7분의 1에 불과 했다.]되었고, 이를 그대로 믿은 야마모토는 솔로몬 해역 일대의 일선 항공기지인 부겐빌 섬의 부인기지로 시찰을 나갔다가 암호 해독을 통해 그의 이동을 파악한 미군이 출격시킨 전투기 기습 공격에 의해 사망하고 만다.(1943년 4월 18일) 요약하자면 '''수송작전실패로 인해 불안이 더해진 일본 육군은 황급히 방어태세를 정비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일본 해군은 조급하게 반격에 나섰다가 적의 군세는 꺽지도 못한 채 되려 [[야마모토 이소로쿠|최고지휘관]]을 잃게되는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게 된 것이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과달카날 전역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라바울의 포위를 목표로 일련의 거대한 작전(Operation Cartwheel / 수레바퀴 작전)을 이미 수립해둔 상태였고, 1943년 중반부터 솔로몬 제도 일대와 동부 뉴기니 일대에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보급선이 끊긴 동부 뉴기니의 일본 육군은 자신들의 전방 거점이었던 라에와 살라모아에서 계속 저항했지만 결국 1943년 9월에 연합군에 의해 밀려나 버렸다. 야마모토가 죽은 뒤 일본해군 수뇌부의 역량은 더욱 떨어졌고, 솔로몬 제도에서도 일본군은 일방적인 수세에 몰려서 연합군에게 자신들의 점령지를 점점 내주기 시작했다. '''결국 1943년 말에 이르면 일본군 스스로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되어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대부분의 지역이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다.''' 뉴기니에서는 연합군이 비티아즈 해협 일대를 장악하고 본격적으로 웨왁과 마당을 위협하기 시작했으며, 라바울이 있는 [[글로스터 곶 전투|뉴브리튼 섬에도 연합군이 침공]]하면서 남태평양 일대를 담당하는 중요 거점이었던 라바울은 포위당한채 점점 말라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일대의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 육군은''' 1943년 9월에 설정된 [[절대방위선]] 안쪽의 방어에 집중하면서 '''사실상 동부 뉴기니 전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빠른 진격에 비해 방어태세 정비가 늦어져서 1944년 초중반에 맥아더 군의 서부 뉴기니 침공때엔 이 일대에 대한 추가 증원을 포기하였다. 동부 뉴기니의 일본군 거점이었던 웨왁은 여전히 건재했으나, 맥아더군이 서부뉴기니를 침공하면서 본토로부터 고립된 채 잉여로 전락해 버렸다. 반대로, '''일본해군은 동부 뉴기니와 솔로몬 일대가 절대방위선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위선에 미군이 도달하는 시간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이 일대의 방어에 더욱 집착'''하였으나, 일본해군이 이 일대에 정신이 팔려있던 1943년 11월부터 '''미 해군의 진짜 주력이 중부태평양을 돌파하기 시작'''([[타라와 전투|길버트 제도 침공]], 먀셜제도 침공, [[헤일스톤 작전|캐롤라인 제도 공습]])하면서 전황은 크게 뒤집어진다. 특히, [[헤일스톤 작전|캐롤라인 제도 공습]]으로 인해 후방기지인 트럭 섬의 해군기지가 박살나 버리자 '''일본 해군이 그토록 매달리던 라바울은 순식간에 군사적 가치를 잃고 말았다.'''[* 미군이 라바울을 직접 공략했다면 태평양상의 미 지상군을 묶어두기라도 했겠지만, 현명하게도 미군은 라바울을 포위만 한 채 그대로 건너뛰어 버렸다.] 한편, 이 전투 이후 표류하다가 사살된 일본군 시체로 부터 일본 육군의 주요 기밀 문서가 연합군 손에 넘어갔다. 특히, 이 당시 일본 육군 장교들의 전체 명부 최신본이 고스란히 연합군 손에 넘어갔으며, 연합군은 이를 통해 일본 육군 전력을 파악하게 된다. 이 전투 이후, 일본 육,해군 할 것 없이 연합군의 항공력이 미치는 곳으로의 상륙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일선부대를 중심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배경이 지극히 일본군 다운데, 육군은 자신들의 병력 이동간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해군에 대한 불신이, 해군은 육군의 작전에 자신들의 아까운 함선들만 날려먹는다는 불만이 그 배경이었다. 이 분위기는 일본 육군의 항공전력 구성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끼쳤다. 불안정한 제공권하에서 전선으로 이동하는 일본 지상군 병력들이 연합군의 항공기에 의해 떼죽음 당하는 일이 계속 이어지자, 일본 육군은 지상병력에 대한 항공엄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일본육군은 43년 9월 이후로 일명 '전투기 초중점주의'를 도입하고 육군항공대 전력내 전투기 비중 확대 및 신형 전투기 배치를 꾀한다. 이는 항공력을 앞세운 미군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이 다분했다. 반면, 일본해군은 해군 항공대의 체질 전환이 꽤나 늦어져서, 공격기, 폭격기 중심의 전력구조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고, 미군이 일본본토 코앞에 들이닥친 시점이 되어서야 제로센을 대체할 신형 전투기의 개발이 이뤄졌지만 너무 늦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